북악산 성곽길에 다녀 오다.
북악산 성곽길에 다녀왔다.
창의문에서 출발하여 삼청공원 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하였다.
약간 쌀쌀했지만 그래도 맑은 날씨여서 서울은 물론 멀리 외곽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특히 백악마루에서 내려다 보는 경복궁과 빌딩숲을 비롯한 서울의 전경은
옛것과 현대, 여유로움과 치열함, 느긋함과 부산함...
이 모든 것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불현듯 내려다 보이는 서울이 건조하다는느낌이 그 순간만큼은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았다.
하기야 누군가는 그곳에서 바라보는 서울이 사랑스럽다는 표현까지 썼으니.
한양의 북쪽을 둘러싸고 있던 북악산은 바람이 차가워진 만큼
바닥에 뒹구는 나뭇잎이 더 많아 보였지만
늘푸른나무들과 어우러진 늦단풍의 자태는
화려함보다 차분해진 모습으로서의 미가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20대 처녀보다 중년의 여성이 때로는 더 아름다운 것처럼.
1박2일을 보고 나서 총알맞은 소나무를 꼭 봐야 된다는 둘째녀석의
끈질긴 주장이 아니었더라도 한 번은 꼭 가봐야 될 곳이었다.
한편으로는 아픈 역사의 흔적이거니와 나무로서는 처량한 과거일테지만
이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꼭 껴안고 포즈를 취했다.
4마리가 21마리로 늘어났다는 사슴까지 덤으로 봤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그건 다음을 위해 남겨놓아도 좋을 듯 싶다.
앙상해진 나뭇가지가 늘어나서인지 황량해 보이는 숲 속에
사슴이 보이기는 더 어려울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마침 백악마루에서는 반대편에서 오던 젊은 해설사 선생과 그 일행을 만났다.
잠깐이었지만 언젠가 책에서 봤던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양을 건설할 때 도성의 4대 관문의 이름을 동서남북의 방위에 따라
각각 흥인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文), 소지문(昭智門)이라 정하였고
이것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목을 반영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고종 임금에 이르러 신(信)을 포함한 보신각(普信閣)을 그 중심에 두었다 한다.
참고로 소지문은 현재 이름인 숙정문으로 바뀌었는데 거기에도 사연이 있다.
종묘에서도 그랬고 다른 궁궐에서도 해설을 들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조상들은 건물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했고 도읍설계도 종합적이었다.
말바위와 창의문 양쪽에서 출발하는 해설과 동행하는 것도 참 좋겠다.
하절기에는 10시와 오후 2시, 동절기에는 10시30분과 2시라고 한다.
늦은 오후 내려온 삼청공원은 귀가를 서두르는 자동차로 꽉차 있었다.
3주 전보다 사람은 줄었지만 차는 늘어난 걸 보면 추위때문인가보다.
길게 줄서 있던 유일한 음식점 ‘삼청수제비’는 마찬가지였다.
궁금해서 안을 한번 들여다보니 여느 식당과 다를 바도 없었다.
주방안에서 열심히 수제비를 뜨고 계시는 분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분주해 보였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궁금증만 더하고 왔다.
매주 일요일 저녁이면 가는 농구에 절대 빠질 수 없다는 큰 아이를
수제비로 설득하기에는 무리였다.
다음 주 일요일에는 회사 사진동호회에서 경복궁, 삼청동 출사가 있다.
갈까말까 했었는데 어제 가야겠다고 결정했다.
요사이 서울 나들이에 재미를 붙인 것도 있지만
시간에 쫓겨 삼청동에서 셔터를 몇 번 못누른 탓도 있다.
아니 거꾸로 다음 주 출사를 염두에 둔지라 셔터를 덜 누른 것도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창의문쪽에서 가장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다가
아이를 업고 내려오는 듬직한 동호회 총무를 반갑게도 마주쳤다.
세상은 넓은 듯, 좁은 듯 늘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