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루 2010. 7. 27. 10:45

2004년 10월에 쓴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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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순이 언니

지은이 : 공지영

아이들 데리고 종종 가는 책방에는 TV 어느 프로그램에서 선정한 책만을 모아 놓은 코너가 있다. ‘봉순이 언니’도 일찌감치 그곳에 자리잡고 있었고 제목부터 정감있는 이 소설을 이번에 두 번째로 읽게 되었다.

그저 재미로만 따져도 읽을만 하지만 ‘봉순이 언니’를 통해서 잊혀져 가는 지난 시간들을 회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이 소설은 단순히 이야기 이상의 느낌과 가치를 주었다.

소설은 작가의 실제 고향이기도 한 서울 아현동을 배경으로 막 다섯 살이 된 ‘짱아’의 가 만난 자기집 식모 ‘봉순이 언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72편의 짧은 이야기들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들은 마치 작가가 스스로 경험한 기억들을 되새기듯이 짱아를 통해 전해주고 있다.

우선 어린 짱아네 집은 미국유학 준비중이던 무기력한 아버지, 곱게 자라 가난에 적응못하는 어머니, 초등학생인 언니와 오빠가 있다. 그러나 짱아에 있어서 봉순이 언니는 가장 남다른 가족의 일원이었다. 봉숭아 물을 들여주기도 하고 언제나 이야기를 들려주던 봉순이 언니는 짱아에게는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정상적인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서울로 올라와 식모살이를 하게 되는 봉순이 언니는 그야말로 비극적인 삶의 연속이다. 의붓아버지에 의해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지내다 짱아네 집 식모로 들어온 봉순이 언니는 짱아네 집에서도 다이아반지 도둑의 누명을 쓰고도 아무말 못하고, 세탁소집 청년과 도망쳤다가도 온몸에 멍이 들게 두들겨 맞은 채 만삭의 몸으로 결국 돌아오는 그녀.

어린 짱아가 눈가에 멍이 들고 입술이 터져 부운 채로 돌아온 봉순이 언니와 눈이 마주쳤을 때 빨간 잇몸을 드러내며 씨익 웃은 모습에 어린 마음에도 기가 막혔다는 기억을 하는 대목은 오래도록 기억이 난다. ‘어떻게 언니는 웃을 수 있는거야 싶은 생각,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으니까 봉순이 언니였다.’이렇듯 짓밟히고 넘어져도 웃음을 잃지 않는 그리고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봉순이 언니를 통해 작가는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다. 이전의 소설들에서 공지영이 보여줬던 거친 필체와 달리 순하디 순한 이야기체여서 느낌이 다르긴 하나 예전부터 작가가 관심을 보여왔던 여성문제에 대해서도 그 끈을 놓지는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늘진 곳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 스스로 가난해서 다른 가난한 이를 진정으로 마음아파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이들, 우리가 그들을 불행하고 어리석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래도 인간은 사랑으로 산다는 믿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 이 캄캄한 겨울 하늘에서 떨고 있는 작은 별들같은 이들을 위한 찬가로 읽혀졌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말을 굳이 읽지 않았어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듯 싶다.

아울러 작가는 어쩌면 근대화를 통해 자본주의가 빛나게 정착해가던 그 기간동안 한편으로는 어두운 그림자마냥 불행과 가난 속에서 헤어나기 힘들던 어느 한편을 조명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즉 경제발전을 통해 성장한 어느 한 편이 짱아네 식구라면 그 뒷면에 있는 어두운 구석은 바로 봉순이 언니인 셈이다. 그래서 봉순이는 발음이 비슷한 ‘공순이’를 대신하는 지도 모른다. 나의 어린 시절 기억으로도 청소년기를 학교가 아닌 산업전선에서 보낸 봉순이 언니와도 같은 이들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공장의 어린 근로자들, 버스 안내양...이들은 결국 지금의 우리나라가 가져온 성장에 무수히 기여를 하고서도 그늘 속의 그림자들이었던 것이다.

삼십년이 지나도 봉순이 언니를 자세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같다. 언제 그랬냐는 듯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 셈이다. 그러니 잊어서는 안될 얼굴인 것이다.

경제성장과 함께 부유해진 삶이 이루어진 반면, 이웃마저도 얼굴마주치기 쉽지 않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봉순이 언니의 이야기는 차디찬 콘크리트 속에서 녹여야할 끈끈한 인정을 찾아야된다는 공감대를 형성시켜주고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불행과 한을 품고서도 드러내지 않고 아니 못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야 했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자기 반성도 하게 해주는 소설이다.

아직은 어린 우리집 아이들에게 이 소설을 읽어줄 수도 설명할 수도 없지만, 언젠가 조금 더 자라서 전해줄 수만 있다면 ‘봉순이 언니’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마치 오뚜기처럼 버리지 않던 봉순이 언니와 희망과 사랑을 어떻게든 전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