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는 즐거움

추억의 영화, Summer story

아침마루 2010. 7. 26. 19:05

오래 전 글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무려 7년 전 써놓은 영화이야기 한 편을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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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벌써 15년 전이군요.

졸업전에 국방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휴학계를 던져 놓고, 빈둥빈둥 노는 것이 지겨웠던 저는 타자학원도 다녀보고, 운전면허를 딴답시고 고물차를 빌려서 배짱 좋게 누비고 다니기도 하고, 백수가 용돈타는 것이 마냥 죄송해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제 나름대로는 하루하루를 알차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늦은 봄날 저는 아르바이트와 관련하여 드나들던 어느 조그만 회사 사무실의 경리 아가씨에 호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 능숙하지 못한지라 마음을 어렵사리 간접적으로 전해 보지만, 그녀가 우선적으로 내걸고 있던 조건은 당시 저로서는 수용하기에 상당히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었으니, 그녀의 말 그대로 옮기자면 "하나님 안에서 사람을 찾고 싶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수들에게는 조건도 아닐 것 같은 그 조건이 저에게 그리도 수용하기 힘들었던 것은 불순(?)한 의도로 기독교 신자가 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최소한의 양심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착하디 착한 제 성품으로 봐서는, 신을 상대로 보잘것 없는 한 인간 녀석이 사기를 친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일로 여겼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서는 과감히 개종까지도 한다는데, 그만큼 제 마음에 확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비겁한 반성도 해봅니다.

한편, 한가해지면 생각이 많아진다고, 그 즈음에 무슨 철학자마냥 머리속에 맴도는 고민 하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정해진 운명인가, 아니면 나의 자유의지인가"라는 거창한 의문이었습니다.

굳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인생이라는 것이 사소한 것부터 무지 큰 것까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인데, 그 선택을 하고 결과까지가 "내 자유의지"인지 "운명"인지 이것이 아리송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운명"이라면 그것은 도대체 "누가" 정해놓은 "운명"인가라는 것도 너무나 궁금한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절대신이 계신 것이 분명해..."

"우주 어딘가에 능력이 뛰어난 외계인들이 지구를 몰래 통제하고 있는 걸꺼야"

암튼 이때의 상상력으로는 엄청난 역사소설이나 SF 영화 몇 개는 거뜬히 만들어 냈을 겁니다.

어쨌든 이리도 고민을 하던 저에게 있어서 그 조건은 너무나 까다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저는 그녀와 처음으로 데이트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날 본 영화가 바로 'A Summer Story'입니다.


혹시 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영화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인터넷의 도움을 받아 이름 등은 찾아냈습니다.)

1900년 경 영국, 프랭크라는 젊은 변호사는 친구와 함께 남서부쪽 시골로 하이킹을 가게 되고 점프를 하다 발목을 다치게 됩니다.

부근 마을에서 메간이라는 아가씨를 만나게 되고, 그녀는 자신이 얹혀 사는 숙부, 숙모 집에 프랭크를 데리고 갑니다.

친구는 먼저 떠나고, 마침 빈방이 하나 있던 그집에서 프랭크는 몇일 동안 머물게 됩니다. 예상하셨겠지만, 청춘남녀 프랭크와 메간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신분차이를 극복하기 힘든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에서, 상류층인 프랭크와 고아인 시골처녀 메간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가족들은 프랭크에게 떠날 것을 요구하고, 그는 메간에게 읍내에 나가 돈을 구한 다음에 며칠 후 읍내에서 만나 같이 떠나기로 약속합니다.

하지만, 은행에서 문제가 생겨 돈을 구하지 못하고 어려움에 처한 프랭크는 마침 휴가를 온 어린 시절 학교친구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같이 온 친구의 동생 스텔라와도 같이 어울리게 됩니다. 돈도 구하게 되고, 부유한 친구일행과 읍내에서 계속 동행을 하면서, 그는 순박한 시골처녀에 대해 자신이 끌렸던 것에 대해 자꾸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상황들이 그를 더 옭매이게 하고 자신을 잘 따르며 호감을 표시하는 귀티나는 스텔라로 인해 계속 마음이 흔들리게 되는 거였지요.

일요일 친구일행과 같이 미사를 보고 나서, 늦었지만 그래도 그게 아니다 싶었는지 메간과 만나기로 한 기차역에 갑니다만,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간은 읍내 곳곳마다 프랭크를 찾아 헤매게 되고, 프랭크도 그녀를 찾아 나서지만 계속 엇갈리면서 만나지 못합니다.

한번은 프랭크가 약간 경사진 길을 향해 급히 올라가는 메간의 뒷모습을 멀리서 발견합니다. 그때 메간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순간 마차가 지나가고, 프랭크가 골목 한켠으로 숨어버립니다. 그리고 프랭크가 다시 얼굴을 내밀었을 때 메간은 다시 사라집니다.

그 뒤로도 서로 한참을 헤매지만 결국 두사람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주) 영화에서 두사람이 간발의 차이로 계속 엇갈리는 장면(특히 마차가 지나가는 장면)은 스토리 전개상 가장 긴장을 주는 부분이기도 했지만, 영화 내내 계속되는 만남과 헤어짐들(이를 위한 선택들)을 "운명"과 "자유의지"에 대입시켜보던 저에게는 정말 인상깊게 남는 장면이었습니다.

온종일 애타게 헤매다니다가 지쳐서 발길을 돌리던 가엾은 메간의 풀에 죽은 표정....지금도 생생할 만큼 가슴이 아팠습니다.

...........

영화의 첫부분은 중년의 남자(프랭크)가 부인과 함께 자동차를 몰고 어느 시골에 가고, 스텔라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리를 잡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프랭크는 마을에 들어가 두리번거리다 메간이 살던 집을 찾고, 조심스럽게 메간에 대하여 묻게 됩니다.

그러면서 옛이야기의 첫장면, 즉 하이킹가서 다치는 이야기가 오버랩되면서 영화가 전개됩니다.

프랭크가 떠난 다음 일어난 얘길 들려준 사람은 메간의 숙부였던 걸로 기억나는데, 프랭크를 만나지 못한 메간이 다시 고향에 돌아와 열달 후 아이를 낳게 되고, 난산으로 인해 아이를 낳으면서 세상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 간간히 들려 오는 총소리가 바로 그 아이가 자라 청년이 되어 사냥하는 소리라고 얘기해 줍니다.

그리고 눈시울에 젖어 묻습니다. "자네, 프랭크 맞지? 메간이 자네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네."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그 시골을 빠져나오는 길에, 프랭크는 토끼 한마리와 공기총을 매고 오는 어린 청년과 눈이 마주칩니다. 직감적으로 예사롭지 않은 사이임을 아는 것처럼 두 사람은 멀어질 때까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여기까지가 John Galsworthy 작인 신파조의 단편소설 "The Apple Tree" 를 영화화한 A Summer Story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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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되면 이 영화의 내용보다는 제 뒷얘기가 궁금하실 겁니다.

얼마후 그녀는 저를 어느 교회의 간증회에 데리고 갑니다.(아마도 그녀 또한 제가 싫지 않았을 것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날 간증을 하신 분은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실제 주인공이신 주요한 목사라는 분이었습니다.

솔직히 엄청난 감동을 먹은 저는 조금은 얼얼한 상태로 앉아 있었는데, 중대한 사건은 이 간증이 끝나고 이어지는 2부행사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응원가같이 외치듯 부르는 찬양 노래 소리와 하나같이 맞추어 쳐대는 박수소리로 이어지는 교회의 자체 2부행사에서 도저히 적응을 못했던 저는 살며시 그 자리를 빠져나오게 됩니다.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생각했던 머릿속이 그때만큼 복잡했을까 싶습니다. 들어갈 용기가 없어도 빠져나올 용기는 있었던 걸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호감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뒤로 한번 더 만난 적이 있으나 이 대목이 그녀와의 마지막 이별이 된 셈이고, 저의 summer story 또한 막을 내립니다.

한참 뒤에 들으니, 다니던 교회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했다는데, 결국 그녀의 조건대로 이룬 셈입니다.

마음 아파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았으니저에겐 짦은 summer story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운명"과 "자유의지"..... 그 당시 몇 달의 고민끝에 제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습니다.

지나간 일은 "운명" , 하지만 닥쳐올 일에 대한 선택은 "내 자유의지", 그런데 그것도 알고 보면 "운명".....

뭔 소리냐구요? 모든 걸 운명으로 하기엔 젊은 녀석 입장에서 도저히 수용이 안되고 해서 결국 타협을 본거지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제발로 성당을 찾아 가게 되고, 세례까지 받습니다.

"스테파노"..... 몇 해째 냉담자로 지내면서도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것으로 믿고 있는 저의 세례명입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돌이켜 보면 '가지않은 길'에 대한 미련 때문에 "운명"이란 걸 수없이 밀어내고 싶기도 했던 그 시절보다, 오히려 조그만 일에도 감사할 일이 많아 "운명"을 철썩같이 믿고 싶어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늘 변함없는 저의 생각입니다.

2003년 어느 여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