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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기록, 삶의 흔적

미래를 보고 오다.

오랜만에 고향 나들이에 간 김에 가족 모두 상산고에 다녀왔다.

1회 졸업이니까벌써 30년이 가까워 올 만큼 세월이 흘렀으니저층 아파트 몇 동만이 그대로일 뿐비포장 시골길 같던 진입로며 주변이 이제 번화한 도시가 되어 있었다.

학교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아내와 이이들 모두 탄성을 지른다.

아름다운 조경과 그 사이 보이는 단정한 모습의건물들이 보통 고등학교와는 전혀달라서였다.

내가 봐도건물 몇 개 늘어난 정도가 아니라 보다 울창해진 나무들과 가꿔진 전경이 우선 고급스러웠다.

조금 규모만 작을 뿐 아주 예쁜 캠퍼스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하기야 내가 다니던 시절에도 그런 소리는 들었으니 벌써 몇 동의건물이 늘어나고 나무들이 자라 채워진 지금이야 어찌 더 어울리지 않을 소리일까.

아침에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축구공을 챙겨간 두 녀석이처가집 아파트 단지 공터에서 기어이 놀겠다고 하는 걸

아빠 모교에 가서 함께 차자고 했던지라 인조잔디 구장이 내려다 보이는 순간 환호를 지른다.

차에서 내려아내는 본부석에 앉아 쉬고 두 아이들과 가볍게 공차기를 하였다.

한참 후 수업 종료를 울리는 음악벨 소리가 울린다.

방학 중임에도 수업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방을 맨 아이들이 한 손에 책을 들고 삼삼오오 교실이 있는 본관에서 나온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기숙사 쪽을 향해서 일부는 도서관을 향해서이동을 한다.

조금 있으니 트랙을 산책하는 아이들, 농구장 두 군데에는 벌써 여러 명이 경쾌하게 볼을 튀기고 슟을 던진다.

잠시 후에 우리가 놀던 반대편 골대쪽에 대략 10여명의 아이들이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축구 연습을 시작한다.

몇 분 더 지나 우리 쪽 골대에도 흰색 유니폼의 아이들이 몰려온다.

아무래도 축구시합이 시작될 듯하여 나는 두 개구장이를 설득해 슬슬 본부석 쪽으로 이동을 했다.

흰 유니폼의 학생 하나가 뒤를 따라오더니 정중하게 부탁이 있다고 한다.

10분 정도 연습한 후에 시합이 시작되는데 자기들은 공이 없어 좀 빌리자고 한다.

흔쾌히 공을 건네니 꾸벅 인사를 한다. 참 예의바른 학생이다.

아내는 아쉬움이 남아 있는 큰 아이 홍진이을 의식해서 함께 데리고 놀면 안되냐고 한다.

망설임없이 좋다고 한다.

사실은 내가 이학교 1회 졸업한 자네 선배라 하니 다시 한번 인사를 한다.

홍진이가 들어가자마자 어색했던지 바로 운동장을 나오니 몇몇 아이가 당황했던지 연습을 멈추고 우리 쪽을쳐다본다.

상관없으니 계속하라는 사인을 보냈더니 대여섯명 모두가날 향해 인사를 한다.

저녁식사를 위해 처가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어 가자는 아내였지만 구경하고 싶다는 두 녀석 핑계를 대고 조금만 보다 가자고 했다.

막상 시합이 시작되니 구경하는 두 녀석은 물론 아내마저 더 재미있어 한다.

상당히 더운데도 다들 정말 열심히들 뛴다. 그런데 이녀석들 뛰는 모습이 좀 다르다.

자기 편 누군가가 멋진 모습을 보이면 하나같이 칭찬의 환호를 질러준다.

그리고 어쩌다 실수라도 하면 괜찮다며 큰 소리로 격려한다.

살짝 부딛히거나 넘어지기라도 하면 손내밀어 일으켜 세워주며 괜찮냐는 표정과 입모습이 보인다.

경기 내내 이런 모습이 이어졌다.

승리를 위해 열심히 뛰는 것은 기본이지만 승부만이 목적은 아니었던 것이다.

참 감격스러운 관전이었다.

학교 안 편의점에 가서 페트병에 든 음료수 몇 병을 사들고 오니 딱 맞춰 전반전이 끝났다.

공 빌려갔던 학생을 멀리서 불러 음료수를 가리켰더니 뛰어온다.

그러더니 다른 아이들도 몰려온다.

'감사합니다'를 연호하는 아이들, 아까 그 학생은 그제서야 내가 1회 선배임을 모두에게 알린다.

'우와 감동이다' '선배님 짱이예요'...

음료수를 나누어 먹는 모습도 참 정겹다.

몇 학년이냐 물으니 고3이란다. 어째 애들이 좀 크다 싶었지만 솔직히 의외였다.

시간이 다되어'안녕히 가세요'를 외치는 후배들을 뒤로 한 채로 학교를 나섰다.

이 시간에 이렇게 뛰어 노는 고3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을까?

전국의 중학교에서 방귀 꽤나 뀌던 수재들이 아닌가.

사람들은 전주라는 지방의 상산고에 묻혀서 그저 공부나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할 지도 모른다.

열심히 공부하고 땀흘리며 놀 때는 확실하게 놀 줄 아는 아이들...

축구 한 판을 해도 동료를 위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아이들.

그렇다. 나의 모교 상산은 공부만 잘하고 자기만 아는 편협한 사람이 아닌

실력도 갖추고 포용과 배려를 갖춘 사려깊은 사람을 키워내고 있었다.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모교의 모습은 평범한 그 시절의 우리대신 수재들로 채워졌을 뿐

교육이념이나 철학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립형 사립고로 바뀌면서 재단 이사장님이 투자한 자비만 해도 110여억이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돈의 액수가 문제인가, 사실 그보다도 더 값진 교육의 꿈을 실천하고 계신 것이다.

나는 그아이들을 보면서 미래를 보았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이 아닌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진정한 리더들이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갈망하는 리더의 모습인가.

..................

데리고 간 두 아들녀석들도 뭔가 느낀게 있나보다.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얘기를 들어서인가 중1 큰아이는 아무래도 자신은 없어하지만 그래도 목표로는 삼은 듯하다.

초등 5학년짜리 둘째 녀석은 더 당차다. 꼭 상산에 입학하겠다고 다짐한다. 기특한 녀석...

언젠가 너희 들 중에 아빠의 후배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몇 해전 내 얘기를 이제서야 기억한 모양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옛날 생각이 나서 들어갔던 본관 1층 로비에 지금도 그대로 걸려있던 '상산인의 헌장'을 옮겨 적어 본다.

상산의 동산에서 가꾸어진 꿈이 여물었을 때 뒷사람은 그것을 역사라고 일컬을 것이다.
상산인은 보다 높은 내일을 향해 보람찬 오늘을 살고 무한한 잠재력의 축적을 위해 순간을 불태운다. 내가 몸담은 터전을 영화롭게 하며 겨레의 전통을 빛낼 소명이 나에게 있다.
나는 이 소명을 세계와 인류로 확산할 책임을 자각한다.
남을 이끌 자는 먼저 자신을 다스린다. 나는 항상 스스로를 돌아 보아 몸가짐을 가다듬고 마음을 활짝 열어 만상을 포용한다.
그리고 나날의 삶이 언제나 새롭기를 기약한다.
진실이 아닌 물은 마시지 않고, 선하지 않은 과일은 탐내지 않으며, 인정이 담기지 않은 음식은 권하지 않는다.
몸은 푸른 산의 강건과 맑은 물의 유연을 조화롭게 따르되, 심성은 아침 이슬의 순결과 가을 하늘의 겸허를 본받는다.
이상의 길은 멀고 성취인의 짐은 무겁다. 위대한 이상의 성취인, 나의 이름은 상산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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