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겸임교수를 맡아서 출강할 때 적었던 글인데 옮겨 놓는다.
글 속의 F학점을 받았던 학생에게 내가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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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기 제 수업을 받았던 학생 중의 한 명인데요, 살다 보니 이런 일이 있네요.
지난 번 기말고사를 사정상 못보게 되었다고 연락이 왔더군요.
그래서 제가 재시험 기회를 줄테니 성적입력시한 이틀 전인 지난 주 금요일까지 저희 회사로 아무때나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금요일까지도 연락이 없더니 하루 지난 토요일 아래와 같은 메일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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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연락처가 없어서 메일보내드립니다...
핸드폰이 부숴지는바람에..
금요일 어제...제가사는 일산에서 시험을 보기위해 정오쯤에 출발하였습니다
도착하여 연락드리고 밥먹고 시험을 보려고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가고있었는데...청담대교건너 고속화도로 이어지는곳에서 사고를 당했습니다
친구가 노트북을 가져다줘서 이렇게 메일보내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약속제일주의가 제 신조인데..정말 죄송합니다
사고덕분에 1학년때 수술한 무릎 인대와 연골이 부분파열 되었습니다.
한 2주남짓 있을것 같네요..
정말 죄송스럽지만 1,2학년 성적이 너무 안좋아서...과목을 포기하기가 힘든데..
중간고사성적으로 대체할수 있는지요...중간고사성적의 일부퍼센트만 주셔도 괜찮습니다..
몇학점 더 펑크나면 스트레이트 졸업이 불가하게 되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교수님.
퇴원하게 되면 꼭 찾아뵈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번 번거롭게 한점 대단히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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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도 잘 봤고 레포트도 성의껏 제출을 해서 딱한 사정을 감안하여 낮지 않은 점수를 줬습니다.
일단 성적입력기간이 26일까지라서 이학생때문에 고민하다가 마감시간 다되서야 입력을 마쳤습니다.
그러고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확인은 해야겠더군요. 다른 학생과의 형평성도 있고 해서요.
그래서 수요일쯤 진단서 사본을 하나 팩스로 보내라고 메일을 보냈습니다.
메일 확인도 안되고 답장도 없고 해서 사정상 그러나보다 했습니다.
어제 휴대폰 번호를 알아내서 전화를 했는데, 받더니 분당 모병원에 있다고 하고 곧 퇴원한다고 하는데
웬지 미심쩍은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진단서 얘기를 꺼내니 조금있다 전화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그 뒤로 전화를 여러번 했는데 아예 안받구요(50초 정도 신호가 가면 일부러 안받는 거라 하더군요.)
그래서 음성도 남기고 문자로도 보냈습니다. 연락하지 않으면 거짓말 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구요.
어제 집에 와서 다시 전화를 하니 받더군요. 모르는 전화번호라 무심결에 받은 모양입니다.
제 목소리인가 싶어서 그러는지 안들리는 척 '여보세요~'를 몇 번 하다가 또 끊어 버리고 그 뒤로 또 안받더군요.
그래서 문자를 또 보냈습니다. 지금 즉시 전화하지 않으면 다음주 화~목 성적정정기간인데 F로 처리하겠다...
그리고 학교측에 이러한 사실을 통보해서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도록 하겠다...고 했는데도 연락이 없는 겁니다.
암튼 확실하게 알아봐야겠다 싶어 아침에 먼저 입원했다는 병원에 전화를 했더니 입원환자 명단 중에 없다고 하구요.
어제 여러번 걸어도 안받던 일산 집에 전화를 해보니 어머님이 받으시더군요.
그래서 좀 여쭤보니 교통사고 난 적도 없고 예전에 수술한 것은 사실이라는데 최근에 다리를 조금 다쳐서
그 병원에 통원치료는 다닌다고 하는 겁니다. 왜그러냐고 물으시길래 최근 일어난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며 제 과목은 F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전화통화하면 될 거라고 레포트를 대신 내거나 등으로 어떻게 안되겠냐고 어머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제 전화 안받는 등을 포함, 학생이 속이려한 모든 행위를 생각하면 절대 안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다음주 성적정정기간에 F 처리하려고 합니다. 맘 약한 걸 악용해서 학생이 선생한테 거짓말하고
그런 것이 통하는 걸 경험하면 이 학생 인생에 결코 도움이 안될 겁니다.
성적 정정이라는 것이 각서도 쓰고 학장님 사인도 받아야하는 복잡한 절차가 있지만 휴가를 내서라도 처리할 겁니다.
사실 이번 학기 학생들한테 학점을 전반적으로 잘 준 편입니다.
어떤 여학생 하나는 중간고사를 안보더니 그 이후로 안보이고 기말고사까지 안본 경우가 있었습니다.
성적입력 전에(학생이 먼저 연락하는게 도리이지만) 맘이 쓰여서 전화를 해보니 개인 사정이 있어서
한 학기를 포기했다고 하더군요. 무슨 일일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할 수없이 F를 주면서 맘이 아팠는데요.
결국 한 학생을 또 F줘야 하는데 이번 일은 너무 마음이 씁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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